한동안은 조금 뜸했었는데
최근 다시 마음이 일렁거리면서
이렇게, 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요즘 내가 가장 꼿혀 있는 취미다.
그리기가 취미였던 건 옛날 옛적부터다.
집에는 항상 아빠가 가지고 오신 이면지가 가득했는데,
나랑 동생은 항상 배를 깔고 누워서 그 위에 뭔가를 열심히 그렸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린 걸 엄마, 아빠, 동생한테 보여주고 자랑하면서 행복했다.
그때는 꿈이 화가였다.
하지만 내 취미와 꿈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미술학원을 좋아했지만 초등학교 2학년때 집근처 학원을 몇 달 다니다가
새댁이었던 선생님이 다른 동네로 이사간다는 이유로 그만 둔 게 전부였다.
대신 가기 싫은 피아노 학원을 꾸역꾸역, 장래 음악적 소양을 쌓는다는 명분으로 몇 년 다녔다.
그런 학원과도 중학교 들어가서는 이별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의 미술은 입시 미술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예체능이 아닌 나는 노트에 어제 본 만화 주인공들을 따라 그리는 것으로 재미와 즐거움을 연명했다.
뭐, 그게 이어져서 고 3때는 뜬금없이 장래희망란에 '만화가'라고 적어 내기도 했다.
습작도, 경험도 없으면서, 그냥 그렇게 쓰면 평범한 내가 좀 튀어보이기도 하고 해서 좋았다.
그래서 어찌어찌 수능 끝나고 바짝 3주 뎃생을 준비해서
예술학과에 들어갔고,
어찌어찌 미술치료를 공부해서
지금까지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닌,
그림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그걸 나는 그림 '언저리'에 살고 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종종 표현했다.
하지만 뭔가 그렇게만 살기에는 항상 갈증이 있었다.
마음의 숙제 처럼, 그림을 계속 배워보고 싶었다.
그래서 재작년 하반기 스케줄을 좀 넉넉하게 비워
미교원에서 1학기 동안 드로잉과 현대미술, 그리고 인체해부학을 들었다.
아마 내 인생에서 제대로된 최초의 미술 실기 경험이었던 것 같다.
미교원에서는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왔던 작가 분들이나 같은 반 분들을 만나
궁금한 걸 물어보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듣고,
내 그림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잘 못그릴까봐 겁도 많이 났었는데,
나름대로 과정을 즐기는 나를 보고 좀 놀랐다. 오예!
그리고 그 덕분에 그림이 다시 내 삶으로 들어왔다.
아르메니아 와서 제일 먼저 했던 것 중에 하나가
화방 가서 물감과 붓을 샀던 거니까.
요즘은 아르메니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텃새들을 그리는 데에 꼿혔다.
여기 새들은 한국 새들과는 달리, 색도 생김도 너무 다채롭고 다양하다.
특히 우리 집 베란다 뒤에 있는 작은 숲은 이 곳에 사는 온갖 새들이 모여 사는 작은 Pueblo로,
Bird Watching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많은 새들을 보기는 하지만, 이름을 잘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학교에 있는 지역 새들의 이름이 적혀진 도록을 하나 사진으로 찍어왔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하면,
1. 구글로 새 이름을 검색
2. 다양한 사진 중에 가장 그 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 같은 사진 선정
3. 사진을 따라 그리고 수채화로 완성
하고 있다.
콜롬비아 와서 나는 수채화가 좋아졌는데,
이렇게 색이 강한 나라에서 유화나 아크릴도 아니고 수채화에 끌리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 곳 화방에는 왠만한 건 다 있지만 종류가 다양한 건 아니라 재료에는 제한이 있지만,
내가 재료 탓 할 정도의 실력자는 아닌지라
18색 수채 물감을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혹시나 하고 오늘 페레이라 Pan America에 다녀왔지만 똑같은 제품밖에 없었다.)
목표는
1주일에 1마리씩 그리기!
그리고 습작 수준이 아닌, 끝까지 가능한 만큼의 완성도를 높여보기!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꾸준함과 파고 들기인데,
이걸 연습하는 데에 그림만큼 즐겁고 보람된 과정도 없는 것 같다.
하다보면 어느 순간 새들로 가득한 거실 벽을 갖게 되겠지?
그러면 얼마나 뿌듯할까.
가장 힘이 나는 사실은,
더 이상 내가 그림 언저리만 기웃거리지 않고 있다는 거다.
꾸준하게 시도하면서
때론 지루함과 피곤함을 견뎌내고,
부족함을 바로 보고,
가능한 것들은 다시 시도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품고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지금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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